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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미치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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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미치마사(藤原道雅)는 헤이안 시대 중기의 귀족이자 시인이다. 995년 아버지 후지와라노 고레치카가 내대신으로 승진했으나, 조토쿠의 변으로 인해 다자이 영주로 좌천되면서 가문의 몰락을 겪었다. 1004년 종5위하에 서작되었고, 간코 8년(1011년) 산조 천황의 즉위에 따라 춘궁권료로 임명되어 고이치조 천황을 섬겼다. 1016년 종3위로 승진했지만 8일 만에 해임되었으며, 가잔 천황의 딸 살해 사건, 사이구와의 부적절한 관계 등으로 좌천되는 등 불우한 삶을 살았다. 그는 폭력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그의 시는 칙찬 와카집에 수록되었고, 백인일수에 그의 시가 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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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미치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치마사 [[백인일수]]
미치마사 백인일수
이름후지와라노 미치마사 (藤原道雅)
별명아라산미 (荒三位), 아쿠산미 (悪三位)
생애
출생992년
사망1054년 8월 25일
관직
관위종3위
직책좌경대부
가계
씨족후지와라 북가중관백가
아버지후지와라노 고레치카 / 후지와라 이주
어머니미나모토노 시게미쓰의 딸
배우자후지와라노 노리타카의 딸
계실야마토노 센지 (다이라노 고레나카의 딸)
자녀조토몬인 쥬죠
간손
여자
가쿠조

2. 생애

조토쿠 원년(995년)에 할아버지 미치마사가 사망하고, 이듬해 아버지 이사다가 불경죄 사건을 일으켜 다자이곤노소치로 좌천되면서, 친가인 중관백가가 몰락하는 가운데 성장한다.

조호 6년(1004년) 종5위하에 서작하고, 이듬해 간코 2년(1005년) 정월에 원복을 하고[5], 시종으로 임관한다. 간코 3년(1006년) 우병위권좌로 임명되자, 간코 5년(1008년) 정5위하・우근위소장, 간코 6년(1009년) 종4위하이치조 조정 후기에 무관을 맡으면서 순조롭게 승진한다.

간코 8년(1011년) 산조 천황즉위에 따라, 춘궁권료로 임명되어, 새 춘궁·아츠나리 친왕(후의 고이치조 천황)을 섬긴다. 황위 계승 다툼에서 패한 아츠야스 친왕의 외척인 미치마사가 승자인 아츠나리 친왕의 가신으로 임명되는 것은 부자연스럽지만, 미치마사의 처지를 동정하던 아츠나리의 생모 후지와라노 쇼시의 배려로 추정된다.[6]

조와 4년(1015년) 좌근위중장이 되었다. 조와 5년(1016년) 정월에 고이치조 천황 선조에 즈음하여 후지와라노 스케히라와 함께 구라우도노카미로 임명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춘궁권료의 공로라는 명목으로 종3위에 서임되어, 재임 8일 만에 구라우도노카미를 경질당한다.

만쥬 원년(1024년) 12월 6일, 하나야마 법황의 황녀인 조토몬인여방이 한밤중에 노상에서 살해당하고, 다음 날 아침에 시체가 들개에게 뜯어먹힌 모습으로 발견되었다.[17] 이 사건은 조정의 공가들을 전율케 했고, 검비위사가 수사에 나섰으나, 사건은 미궁에 빠진다.

만쥬 4년(1027년)에는 대도장·타카시나 스미요시와 도박을 즐기다가 격렬한 말다툼을 시작하여, 미치마사의 카리에 소매 끝을 찢은 스미요시의 유부·코레무네 카네토와 노상에서 몸싸움을 벌였다. 이 때문에 왕래하는 사람들이 이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많이 모였다고 한다.[21]

고레이제이 조정 간토쿠 2년(1045년) 좌경대부로 전임한다.

40년 가까이 종3위에서 승진하지 못한 채, 덴키 2년(1054년) 7월 10일에 출가하여, 20일 훙거하였다. 향년 63세. 가잔 법황의 황녀를 살해하도록 지시하고, 아츠아키 친왕의 잡색장 오노노 타메아키를 능욕하여 중상을 입혔으며, 도박장에서 난행을 하는 등 난행이 끊이지 않아 세상에서 '''황삼위''' 또는 '''악삼위''' 등으로 불렸다.

2. 1. 가문의 몰락과 불우한 유년 시절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에게 양육되었으며, 미치타카는 995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인 후지와라노 고레치카는 이듬해 내대신으로 승진했지만, 가잔 천황에게 화살을 쏜 사건으로 인해 다자이 영주로 좌천되었다.[2] 미치마사는 가문의 몰락기에 살았다.

조토쿠 원년(995년)에 미치마사의 할아버지 미치타카는 사망하고, 이듬해 조토쿠 2년(996년) 아버지 후지와라노 이사다는 내대신이라는 고관에 있었으나 하나야마 법황에게 활을 쏘는 불경죄 사건을 일으켜 다자이곤노소치로 좌천되었다. (조토쿠의 변) 이로 인해 친가인 중관백가가 몰락하는 가운데 미치마사는 성장한다.

2. 2. 관직 생활과 좌천

후지와라노 미치타카에게 양육되었으나, 미치타카는 995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인 후지와라노 고레치카는 이듬해 내대신으로 승진했지만, 가잔 천황에게 화살이 발사된 사건으로 인해 다자이 영주로 좌천되었다. 미치마사는 가문의 몰락기에 살았다.[1]

1004년, 14세의 나이에 종5위하의 관위를 받았다. 1011년에는 훗날 이치조 천황이 되는 인물을 섬기게 되었다. 1015년에는 좌근위중장이 되었다. 1016년, 이치조 천황의 즉위 시기에 종3위로 승진했으나, 재임 8일 만에 해임되었다. 같은 해 9월, 황녀 마사코를 이세로 호위하여 사이구로 삼으려 할 때, 그들의 관계가 산조 상황에게 알려지면서 미치마사는 크게 질책을 받았다. 에이가 모노가타리에 따르면, 마사코는 아버지의 죽음 전에 삭발을 했지만, 《쇼유키》에 따르면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 6개월 후인 1017년 11월 13일에 삭발했다.[1]

1024년 12월 6일, 가잔 천황의 딸인 조토모인이 밤에 살해되었고 다음 날 아침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듬해 용의자가 체포되었지만, 용의자는 미치마사의 명령으로 그녀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이듬해 1026년,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치마사는 좌천되었다. 1054년 7월에 삭발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2]

그의 관직 생활을 연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연도관직
1004년종5위하
1005년시종
1006년우병위권좌
1008년우근위소장, 정5위하
1009년종4위하
1011년춘궁권료
1013년종4위상
1015년좌근위중장
1016년구로도노토, 종3위
1024년이요권수 겸임
1026년우경권대부로 좌천
1045년좌경대부
1054년출가


2. 3. 만년

조호 6년(1004년) 종5위하에 서작하고, 이듬해 간코 2년(1005년) 정월에 원복을 하였다.[5] 시종으로 임관했다. 간코 3년(1006년) 우병위권좌로 임명되었고, 간코 5년(1008년) 정5위하·우근위소장, 간코 6년(1009년) 종4위하이치조 조정 후기에 무관을 맡으면서 순조롭게 승진했다.

간코 8년(1011년) 산조 천황즉위하자, 춘궁권료로 임명되어 춘궁·아츠나리 친왕(후의 고이치조 천황)을 섬겼다. 황위 계승 다툼에서 패한 아츠야스 친왕의 외척인 미치마사가 승자인 아츠나리 친왕의 가신으로 임명된 것은 부자연스러우나, 미치마사의 처지를 동정하던 아츠나리의 생모 후지와라노 쇼시의 배려로 추정된다.[6] 그해 12월 15일, 키타노의 제장에서 미치마사가 후지와라노 요리무네 및 그의 동생과 다른 사람의 험담을 주고받은 것이 발견되어 문제가 되었다.[9][10] 요리무네는 미치마사의 매형이며, 동생은 후지와라노 아키노부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처벌은 없었지만, 이듬해 아키노부가 출분·출가했다.[11] 또한, 미치마사의 아내 다이라노 코레나카의 딸이 이혼하여 중궁 후지와라노 겐시를 섬기게 되었고, 험담에는 여방들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고 한다.[12]

조와 2년(1013년) 정월, 미치마사와 후지와라노 카네타카·후지와라노 츠네미치가 칙간을 받았다.(원인 불명)[13][14] 같은 해 4월,[15] 산조 천황황자·아츠아키라 친왕(고이치조 조정의 황태자)의 종자 직부사초문사·오노노 타메아키가 아츠아키라의 어머니 황후·후지와라노 겐시가 사는 홍기전에 참상한 곳을, 아츠나리 친왕의 종자에게 납치당해 자택으로 연행되었다. 미치마사는 타메아키의 머리카락을 잡고 주변 사람들에게 폭행하게 하여 중상을 입혔다. 이후, 아츠아키라 친왕의 소송으로 미치마사는 근신 처분을 받았다.[16]

조와 4년(1015년) 좌근위중장이 되었다. 조와 5년(1016년) 정월, 고이치조 천황 선조에 즈음하여 후지와라노 스케히라와 함께 구라우도노카미로 임명되었지만, 춘궁권료의 공로로 종3위에 서임되어 재임 8일 만에 경질되었다. 같은 해 9월, 이세 사이구에서 퇴하하고 귀경한 토시나이 친왕과 밀통하여, 이듬해 조와 6년(1017년) 산조인의 노여움을 사 칙간을 받았다. 토시나이 친왕은 병으로 출가했다.[16]

만쥬 원년(1024년) 12월 6일, 하나야마 법황의 황녀 조토몬인여방이 노상에서 살해당하고, 다음 날 시체가 들개에게 뜯어먹힌 채 발견되었다.[17] 조정의 공가들은 전율했고, 검비위사가 수사에 나섰다. 이듬해 만쥬 2년(1025년) 3월, 우위문위·타이라노 토키미치가 용의자 법사 류호를 체포했다. 7월 25일, 류호는 미치마사의 명령으로 황녀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요리미치 부자도 경악했다.[18] 7월 28일, 살해 사건의 도적 두목이라는 자가 자수를 신청했다. 우대신·후지와라노 사네스케는 자수범 고문 불요, 두목 죄상 검비위사 결정 불가 취지를 회신했다.[19] 사건 결착은 불분명하다.[20] 이 사건의 영향으로, 이듬해 만쥬 3년(1026년) 미치마사는 좌근위중장 겸 이요권수에서 파면, 우경권대부(정5위상 상당)로 좌천되었다.

만쥬 4년(1027년), 대도장·타카시나 스미요시와 도박 중 말다툼을 벌이다 미치마사의 카리기에 소매 끝을 찢은 스미요시의 유부·코레무네 카네토와 노상 싸움을 벌였다. 구경꾼이 몰려들었다.[21]

고레이제이 조정 간토쿠 2년(1045년) 좌경대부로 전임했다. 중관백가 계통 인사들의 승진만 있었다. 전년 후지와라노 타카이에 사망, 고스자쿠 천황 붕어로, 조토쿠의 변부터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와 이사다 대립 관련자 중 쇼시만 생존, 대립이 과거가 되었음을 상징하는 인사로 평가된다.[22]

40년 가까이 종3위에 머물다 텐키 2년(1054년) 7월 10일 출가, 20일 훙거했다. 향년 63세.

3. 와카

후지와라노 미치마사는 와카에 능숙하여 주고 36가선 중 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의 시 5수가 고슈이 와카슈에, 2수가 시카 와카슈에 실렸는데, 이 두 작품은 모두 천황의 명으로 편찬된 와카집이다.[23] 백인일수에 실린 그의 시는 마사코 내친왕의 아버지로부터 그들의 관계를 알게 된 후, 미치마사가 그녀를 만나는 것을 금지당한 것에 대한 그의 응답으로 일반적으로 해석된다.[3]

『고슈이 와카슈』에는 "이세의 사이구(斎宮)가 떠나갈 때 즈음에, 몰래 사귀던 사람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호위 여자를 붙여 몰래 사귀는 것도 불가능해지자, 읊은 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쿄다이후를 맡았던 만년에는 하치조의 저택에서 "사쿄다이후 하치조산쇼 쇼지 와카아와세(左京大夫八条山庄障子和歌合)"라는 우타아와세를 주최했다.

3. 1. 백인일수

지금은 다만 포기하겠다는 그 한 마디를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전할 수 있다면.[3]

いまはただ|이마와타다|지금은 다만일본어

思ひ絶えなむ|오모히타에나음|마음을 끊으리일본어

とばかりを|토바카리오|~라고만일본어

人づてならで|히토즈테나라데|다른 사람을 통하지 않고일본어

言ふよしもがな|이우요시모가나|말할 수 있다면일본어[3]

백인일수에 실린 이 시는 마사코 내친왕의 아버지로부터 그들의 관계를 알게 된 후, 미치마사가 그녀를 만나는 것을 금지당한 것에 대한 그의 응답으로 일반적으로 해석된다.[3]

3. 2. 기타

그는 쇼유키에서 폭력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그의 시 5수가 고슈이 와카슈에, 2수가 시카 와카슈에 실렸는데, 이 두 작품 모두 칙찬 와카집이다.[23] 백인일수에 실린 그의 시는 마사코 내친왕의 아버지로부터 그들의 관계를 알게 된 후, 미치마사가 그녀를 만나는 것을 금지당한 것에 대한 응답으로 일반적으로 해석된다.[3]

今はただ思ひ絶えなんとばかりを人づてならで言ふよしもがな|이마와 타다 오모히타에난토 바카리오 히토즈테나라데 이우 요시모가나일본어

이제 바라는 것은 직접 당신에게 말할 방법 --다른 사람을 통하지 않고-- '더 이상 당신을 생각하지 않겠습니다!'한국어

'''백인일수''', 시 63[3]

미치마사와 전 이세 여관과의 관계는 에이가 모노가타리 여러 곳에서 언급된다. 서술자는 아리와라노 나리히라가 이세 여관과 맺은 관계와 미치마사와 마사코의 관계를 비교한다. 그러나 서술자는 마사코가 더 이상 여관을 섬기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정도의 큰 잘못은 아니라고 지적한다.[4]

가잔 법황의 황녀를 살해하도록 지시하고, 아츠아키 친왕의 잡색장 오노노 타메아키를 능욕하여 중상을 입혔으며, 도박장에서 난행을 하는 등 난행이 끊이지 않아 세상에서 '''황삼위''' 또는 '''악삼위'''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한편으로 와카에 능숙하여 주고 36가선 중 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습유화가집』 5수, 『시화화가집』 2수, 칙찬 와카집에 총 7수가 수록되었다.[23]

『오구라 백인일수』에는 미치마사가 당자 내친왕에게 보낸 시가 채록되어 있다.

今はただ思ひ絶えなんとばかりを人づてならで言ふよしもがな|이마와 타다 오모히타에난토 바카리오 히토즈테나라데 이우요시모가나일본어

지금은 그저 마음 끊어지려 할 뿐, 남의 말을 통해서가 아니면 말할 방법이 없네한국어

『오구라 백인일수』 제63번

『고습유화가집』에는 "이세의 사이구(斎宮)가 떠나갈 때 즈음에, 몰래 사귀던 사람이 있었는데, 조정에서도 이를 알고, 호위 여자를 붙여 몰래 사귀는 것도 불가능해지자, 읊은 시"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쿄다이후를 맡았던 만년에는 하치조의 저택에서 "사쿄다이후 하치조산쇼 쇼지 와카아와세(左京大夫八条山庄障子和歌合)"라고 불리는 우타아와세를 주최했다.

도박을 둘러싸고 다카시나 요리나리와 싸움을 벌였던 만주 4년 (1027년) 말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병사한 이후, 미치마사의 문제 행동이 수그러들었는지 소동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게 된다.[24] 서문으로부터 조큐 연간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다이니혼코쿠 홋케겐키』에 기록된 미나모토노 마사미치의 극락 왕생담 중에서 마사미치의 왕생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미치마사와 노니(老尼)가 논쟁하여 최종적으로 미치마사가 노니의 설에 동의하여 신심을 얻는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편찬 연대가 사실이라면 미치마사가 생존해 있던 중에 성립되었으며, 미치마사는 당시 세속에서는 이미 반쯤 과거의 전설상의 인물 또는 오랫동안 무해무익한 인물로 취급받았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25]

4. 평가

가잔 법황의 황녀를 살해하도록 지시하고, 아츠아키 친왕의 잡색장 오노노 타메아키를 능욕하여 중상을 입혔으며, 도박장에서 난행을 하는 등 난행이 끊이지 않아 세상에서 '''황삼위''' 또는 '''악삼위'''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23]

한편으로 와카에 능숙하여 주고 36가선 중 한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습유화가집』에 5수, 『시화화가집』에 2수, 칙찬 와카집에 총 7수가 수록되었다.[23]

『오구라 백인일수』에는 미치마사가 당자 내친왕에게 보낸 시가 채록되어 있다.

『고습유화가집』의 사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사쿄다이후를 맡았던 만년에는 하치조의 저택에서 "사쿄다이후 하치조산쇼 쇼지 와카아와세(左京大夫八条山庄障子和歌合)"라고 불리는 우타아와세를 주최했다.

도박을 둘러싸고 다카시나 요리나리와 싸움을 벌였던 만주 4년 (1027년) 말에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병사한 이후, 미치마사의 문제 행동이 수그러들었는지 소동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게 된다.[24] 서문으로부터 조큐 연간에 편찬된 것으로 여겨지는 『다이니혼코쿠 홋케겐키』라고 불리는 설화집에 기록된 미나모토노 마사미치의 극락 왕생담 중에서 마사미치의 왕생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미치마사와 노니(老尼)가 논쟁하여 최종적으로 미치마사가 노니의 설에 동의하여 신심을 얻는다는 일화가 실려 있다. 편찬 연대가 사실이라면 미치마사가 생존해 있던 중에 성립되었으며, 미치마사는 당시 세속에서는 이미 반쯤 과거의 전설상의 인물 또는 오랫동안 무해무익한 인물로 취급받았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25]

참조

[1] 서적 A Tale of Flowering Fortunes: Annals of Japanese Aristocratic Life In the Heian Period, Volume 1 1980
[2] 문서 Shōyūki
[3] 서적 Pictures of the Heart:The Hyakunin Isshu in Word and Image 1996
[4] 서적 A Tale of Flowering Fortunes: Annals of Japanese Aristocratic Life In the Heian Period, Volume 1 1980
[5] 문서 小右記 寛弘2年正月4日条
[6] 간행물 2007
[7] 문서 寛仁4年7月10日条
[8] 간행물 2007
[9] 문서 小右記 寛弘元年12月15日条
[10] 간행물 2007
[11] 간행물 2007
[12] 간행물 2007
[13] 문서 小右記 長和2年正月25日条
[14] 간행물 2007
[15] 서적 殴り合う貴族たち 平安朝裏源氏物語 柏書房 2005-09
[16] 문서 小右記
[17] 문서 小右記 万寿元年12月8日条
[18] 문서 小右記 万寿2年7月25日条
[19] 문서 小右記 万寿2年7月28日条
[20] 간행물 2005
[21] 문서 小右記 万寿4年7月18日条
[22] 간행물 2007
[23] 문서 勅撰作者部類
[24] 간행물 2007
[25] 간행물 2007
[26] 문서 蔵人補任
[27] 문서 近衛府補任
[28] 문서 公卿補任
[29] 문서 中古歌仙伝
[30] 문서 大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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